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케다 신겐 (문단 편집) === 결론 === 고슈 금광 개발, 치수와 같은 내정, 뛰어난 지휘력과 강력한 군대 육성. 뛰어난 부하들의 중용, 호조, 이미가와의 삼국 동맹이라는 외교적 업적, 척박한 가이에서 벗어나 풍족하나 당시 호족간의 다툼으로 분열된 시나노 일대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 전략적인 식견등 전체적인 행적들에서 알 수 있듯이 다케다 신겐의 능력은 전국시대 다이묘들 중에서도 수준급이었다. 다만 긍정적인 평가가 다소 지나쳐 신격화에 이르는 면모도 없지 않다. 애초부터 시나노 일대로의 세력 확장은 부친인 다케다 노부토라시절부터 이미 추구하던 사업이었지 신겐 개인만의 특출한 선견지명은 아니었다.[* 이미 다케다 가문은 예전부터 노부토라에 의해 스와 가문과의 동맹을 맺어 시게노 일족(운노 가문, 모치즈키 가문, 사나다 가문 등)과 격돌, 이들을 시나노에서 축출하여 시나노 동부 지역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당시 다케다 가문의 근거지였던 가이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가이국 동쪽의 호죠, 남쪽의 이마가와는 그 자체로 가이국의 석고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대국이었고, 따라서 양면전쟁을 피하면서 정복에 집중하려면 혼인 외교로 동맹을 맺어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남은 건 서쪽의 히다국과 북쪽의 시나노인데 마침 두 지방 모두 강대국 없이 군소영주들이 난립하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히다국은 기소산맥, 히다산맥이 존재하는, 개마고원처럼 일본 최고도의 고원지대라 공성도, 보급도 어려운 지형이었고 힘들게 점령해도 생산력 자체가 낮았다. 게다가 사이토, 오다와 국경을 맞대게 될 위험이 있었고 시나노보다 가이에서 멀기에 원군을 보내기도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자연히 가깝고, 제3세력의 개입 리스크가 낮으며, 생산력/교통망 정비에서 메리트가 있는 시나노국을 침략하게 된 것. 경쟁자인 겐신과 비교해 그나마 반란으로 인해 골치는 덜 썩어서 가문과 영지내 지방 호족들을 결속시키고 안정화 시키는 능력이 더 높았다고 인식되기는 하나, 이것은 오해인데 이미 신겐 이전에 부친 다케다 노부토라가 다케다 가문내의 분쟁을 정리하고 가이를 통일하면서 다케다 가문의 지배와 군림에 대들고 저항할 지방 호족들과 지방 사무라이들을 이미 충분히 밞아버린 상태였다. 물론 신겐 시절에 다케다의 세력이 급격히 늘어난 이후에도 시나노를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하는등 신겐의 관리능력이 탁월하다는 거야 명백히 입증됐지만 이러한 것들도 본인이 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직접 처리해야만 했던 겐신[* 겐신때 에치고 통일이 이뤄졌다. 이때 겐신의 나이가 22세. 다이묘가 된 나이는 19세였다.]과 비교해 신겐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좀 불공평한 것이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아들 카츠요리의 [[나가시노 전투]]의 패배에 대해 카츠요리의 멸시와 비하, 조롱과 더불어 신겐 본인에 대한 지나친 추앙이 있다. 만약 신겐이 살아 있었다면 달랐을꺼라는 가정법 또한 말이 안 되는 것이, 사실 신겐의 아들 카츠요리의 패배는 아버지의 다소 근시안적 외교적 행적들, 특히 대 오다 포위망에 협공하는 모양새를 취한 부친 신겐의 뒷처리를 떠맡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신겐이 병사하지 않고 오다 + 도쿠가와 동맹에 대한 배후 찌르기가 성공해서 오다 가를 완전히 몰락시킬 수 있었다면 뛰어난 전략이고 신의 한수가 되었을 것이며, 실제로도 오다, 도쿠가와 동맹은 신겐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며 아주 크게 당하고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문제는 신겐 본인이 침공 도중에 병사해버려서 오다, 도쿠가와 동맹이 재기했던 것. 이미 신겐 생존 당시에도 다케다 가문은 갈수록 강대해지는 오다 가문과 1:1로 맞설 역량은 아니었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사방에서 협공 당하자 배후를 위협하면서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 되었고 당연히 어그로를 대거 끌어버렸다. 그런데 정작 오다 가문을 끝장내지 못했기에 이후에는 신출귀몰한 전략이나 기책, 운으로 승부를 봤어야 하는 진짜 모 아니면 도인 상황을 맞이했다. 물론 다케다 측은 2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오는 등 총전력을 동원했고 이정도로 판을 크게 벌렸다면 반드시 단기간 내에 끝장을 봐야 했는데[* 오다 가문은 무섭게 세력이 확장중이었고 오다 노부나가의 뛰어난 내정/상업 정책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했음에도 기반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 석고를 기준으로 봤을때 단독 전력으로는 이미 전국시대 최강의 세력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오다를 적수로 돌렸다면 오다 가문의 숨통을 끊어놓거나 하다못해 오다 가문을 크게 몰락시켜야만 했고, 최소한 도쿠가와를 멸망시켰어야 오다를 상대할만 했을 상황이었다.] 이를 하지 못했기에 뒷감당과 대규모 침공을 저지른 대가를 카츠요리 시대에 가이 다케다 가문의 멸문으로 치룬 것이다.[* 현재 남겨진 다케다 신겐의 후손들은 다케다 가문이 아닌 운노 가문을 이은 다케다 가문의 차남이다. 물론 다케다 신겐의 직계후손이기에 현재는 이들이 가이 다케다 가문의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즉 카츠요리에 대한 과한 비판은 신겐의 지나친 신격화 과정에서 신겐 본인이 대대적으로 벌린 일의 뒷감당을 후계자로서 하기 싫어도 해야만 했던 처지였던 카츠요리가 일방적으로 성토되고 비난받게 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